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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Journey/국내여행기

[BP/국내/나주] 나주 금성관

by bass007 2018. 11. 6.

BP's : 나주 하얀집 앞에 있는 금성관. 

예전에는 사신들이 묶었던 곳이라고 하니. 국빈 호텔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구도심에 위치해 있고, 이외에 볼 것이 그리 많지 않아서 휑한 느낌도 좀 난다. 

쓰레기통이랑 이런 거는 좀 잘 안보이게 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한가롭게 산책하기 좋다. 

입구에는 왕만 걸어다닐 수 있는 가운데 툭 튀어나온 돌이 있는데, 그 곳으로 걸으면서...예전에 왕은 나주와 같은 지방에 몇 번이나 나와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주 금성관 - 위키피디아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초창은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곁에는 삼층석탑(보물50호), 사마교비, 금성토평비, 목사선정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는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건축물이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오늘도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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