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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WU] 절두산 순교 성지

by bass007 2020. 7. 28.

BP's : 합정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저기 뭘까? 라고 생각하며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 

절두산 순교성지. 

합정역에서 7번 출구에서 한강쪽으로 내려가면 갈 수 있다. (중간에 우동 맛집 교다이야가 있다) 

입장료 같은 것은 없고, 

이 날은 지나는 데 관리인 같은 분이 QR 코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만들다가. 

공원만 들어갈 것이라고 하니 그러면 안만들어도 된다고 -_-;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할 정도로 고즈넉한 곳이었고, 안쪽에서 한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오신 분들도 신도이시거나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라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신념... 

종교를 바꾼다고 하면 살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순교하신 그 분들은 말만 하지 않으면 되는

그 것조차 부끄러우셨던 것 같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과 같았던 것인데. 

대단한 믿음과 신념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 죄라는 것이기 보다는 

당시 기득권 세력이 그 때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탄압을 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그런 일들이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을지도... 

네가 과연 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

 

한강공원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어서. 

공원을 돌아본 뒤에 한강에서 여유를 즐기다가 왔다.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양화나루(楊花津) 윗쪽의 ‘잠두봉’이다. 그 이름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 양화나루는 용산 쪽 노들 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삼개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이러한 시를 남겼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11월 11일에 사적지 제 399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아름답던 이곳이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그 해 벽두부터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흥선 대원군은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이곳 총융진(總戎陣)에 형장을 설치하고 신자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866년 9월 26일(음력 8월 18일)에 로즈(Roze)가 이끄는 세 척의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나루와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중국 체푸로 돌아갔으며, 10월에는 다시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을 거쳐 강화읍을 점령하였다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여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쳐 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병인박해 [ 丙寅迫害 ]

요약 1866년 조선 조정(朝廷)에서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홈페이지 : http://www.jeoldusan.or.kr/renew/

오늘도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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