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P's : 살다보면 불편한 일이 있다. 해야할 것 같은데 외면하고 싶은.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찜찜함. 남영동 1985는 그런 영화였다.
이미 어떤 내용인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할 것 같은 생각이 계속 미루게 됐다.
1985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어릴때라 그래서 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 때..85학번이었다면 나는 그 때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매트릭스에서 니오가 붉은 약을 선택했을 때 받으들여야 하는 현실. 그 것은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판단하고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나라면....어땠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언제나 적당히 선을 두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적당히 외면해왔던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등장하는 일들이 불과 30년전의 일인 것을 감안하면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 고문피해자 김근태님과 고문가해자 이근안, 남영동...그리고 주변 상황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김근태님처럼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박종철님까지. 아이러니한 것은 박종철님이 고문을 당했던 이유는 운동권 선배 박종운 이라는 사람의 소재를 대라는 것이었는데, 이 박종운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된다. 정권을 비판하던 운동권 출신들이 결국 권력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종종보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의식이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주변환경에 최대한 적절하게 선택적으로 대응하려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대학 때 알던 사람들도 그렇게 변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너무 밋밋하지는 않을까? 노파심이 들었다. 현실을 영화로 재현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내겠지만 장소가 너무 한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23일간의 고문은 그 자체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들, 그리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에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몰입할 수 있었다.
지나갔지만 기억해야 하는 그 일들을 영화는 다시 만들어냈고, 모두가 잊어주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에게 몸에 주홍글씨를 새겨주었다.
안타깝게도 김근태 장관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고문의 가해자였던 이근안은 자서전을 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역설적이게 이근안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던 것은 김근태 장관님 같은 분들의 고문 값이다. 고문 가해자 이근안을 비롯해 밥벌이를 위해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제목 : 남영동 1985
감독 : 정지영
주연 : 박원상, 이경영, 명계남, 김의성. 우희진
추천 : ★★★★☆
다음영화 :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71486
영문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온 한 남자
바로 그에게 폭력이 가해진다.
김의성님은 요원으로 나온다. 이 영화와 26년에 모두 나오는 배우들이 있다. 이경영님도. 어떻게 보면 김의성님은 두 영화에서 모두 이어질 수 있는 역할이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잠도 재우지 않고, 밥도 주지 않는 상태에서 쓰게 하는 자술서
중간 중간....전무, 사장님...등의 호칭을 쓰는 직원들이 등장한다. 이분들은 그 때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판단할까. 두 주인공 이외에 자신의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고문..
문성근님이나 명계남님은....어떻게 보면 현실 세계와 정반대의 역할을 아주 잘 해내신다...
우희진님도 오래간만에 등장한다....
영화의 엔딩에는 당시 고문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고문은 적게는 30년, 많게는 40년이 지났지만...그들은 여전히 고문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나오는 이 눈동자는 그 누군가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 의미...
* 관련 정보
김근태 장관님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7%BC%ED%83%9C_(1947%EB%85%84)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대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9월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23일간 안기부[1]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을 받았다.[2][3][4]
1996년부터 제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 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2][5] 2011년 12월 초 뇌정맥혈전증 투병사실을 공개하였고, 12월 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였다.[6] 향년 64세.
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5760.html
김근태는 이근안을 용서하지 않았다 / 방현석
‘고문으로 인생이 파괴되고,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누구로부터도 사과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고 있다. 내가 고문을 용서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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